백과사전식 지루한 역사책은 가라!
토크와 다큐로 만나는 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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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
저 자 : 왕현철 | 가 격 : 17,800원 | 쪽 수 : 328쪽 | 판 형 : 신국판(152*225) |
인 쇄 : 올컬러 | ISBN : 9791190238670 | 발행일 : 2021.11.10 |
도서 소개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은 교양, 역사교양 전문 PD가 조선왕조실록 콘텐츠를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맛깔나게 버무려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키워주는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현장 중계하듯 깊고 재미있게 해석하며, 우리가 무심코 넘긴 사건과 인물을 포착해 역사 읽기의 재미를 더한다. 특히 왕과 신하들의 고민과 날카로운 대립, 입담을 간간이 만화로 책에 수록해 역사 이야기가 더 쉽게 재미있게 다가온다.
―조선왕조실록을 현장 중계하듯 깊고 재미있게 해석한다
화려한 TV 속 조선 국왕의 즉위식은 없었다!
TV 드라마에서 조선 국왕의 즉위식은 화려하다. 왕은 최고의 예복인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왕비는 적의를 입고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왕과 신하들의 형형색색 옷만으로도 궁궐의 너른 뜰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풍악이 울려 퍼지고 홍양산을 받쳐 쓴 왕과 왕비가 어좌를 향해서 걸어가 신하들의 하례축하인사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의 즉위식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런 왕의 즉위식은 없었다. 조선시대 국왕의 즉위식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치러졌고, 대부분은 눈물바다였다. 즉위식이 눈물바다였다니 뚱딴지같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드라마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허구를 보태고 극적인 완성도를 높여 판타지를 만든다.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둔갑하는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는 역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속 왕과 신하, 백성들이 일구어낸 드라마틱한 역사를 현장감 있고 충실하게 전달한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간군상과 사건을 만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키운다
다큐멘터리는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을 빼고 철저한 사실을 근거로 객관적 시각을 전달하는 것이 생명이다. 저자는 KBS PD로 입사해 , <역사추리> 등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그런 훈련을 받았고, 그를 바탕으로 역사 프로그램 을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도 객관적인 관점에서 원전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진진했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큐멘터리 PD로서 객관적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찾아내려는 직업적 소명이 꿈틀거렸다. 어느 순간 이 소중하고 방대한 기록물을 전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KBS를 퇴직한 후 제2의 인생을 투자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이 수두룩했고, TV 드라마 등에서 잘못 알려진 내용도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왕, 수많은 신하들과 시공간을 초월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에 희열을 느꼈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저자 왕현철은 우리가 역사를 좀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조선왕조실록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충실하게 들여다보고 깊이 있게 해석한다. 마치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의 핵심은 토크로 기억하게 한다
● 태종18년 8월 8일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 또한 족하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한 말이다.
왕의 자리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 세종14년 11월 7일
세종 : “법률을 이두로 번역해서 백성에게 알려라.”
허조 : “백성이 법을 알면 농간을 할 것입니다.”
법률 조항을 백성에게 알려야 하는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임금과 신하간의 팽팽한 논쟁이다.
● 세조5년 1월 15일
“언로를 열면 국가가 평안해질 것이고 언로를 닫으면 국가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임금은 언론에 귀를 열고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 태종 13년 6월 16일
태 종 : 박자청의 임명장에 어째서 동의하지 않는가?
사간원 : 재상은 임무가 매우 중합니다. 박자청의 한미한 가문은 차지하고라도, 척석놀이를 하고 관리를 때렸으니 어찌 재상에 맞겠습니까?
태 종 : 박자청은 공사의 감독을 부지런하게 잘해서 임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너희들은 끝까지 임명에 동의하지 않으려는 것이냐?
사간원 : 만일 공이 있다면 상이나 다른 직책을 주면 됩니다. 저희들은 정말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만일 전하께서 강요하신다면 명을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태 종 : 이것이 무슨 말이냐! 내가 부탁하고 애걸복걸해서 임명에 동의했다고 생색을 내려는 것인가!
박자청의 서경을 두고 태종과 사간원이 나눈 대화이다. 어떻게든 박자청을 임명하려는 태종의 결의와, 자신들의 고유 업무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사간원 간의 팽팽한 대립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은 왕조국가이지만 왕을 견제하는 여러 장치가 있었다. 왕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서경제도도 그중 하나다. 왕이 관리를 임명하고 이름과 이력, 친가 및 외가의 문벌을 써서 주면, 사헌부나 사간원은 그것을 보고 가부를 결정하는데, 50일 안에 서경을 하지 않으면 임명을 철회해야 했다. 일종의 임명 동의로, 현재 국회 인사청문회보다 강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남들 다 아는 교과서 같은 역사 이야기는 이제 그만, 역사와 사건의 핵심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토크’로 역사를 만나자. 역사적 사실이 금방 이해되고 기억하기도 좋은 흥미진진한 토크들이 가득하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곁들여진 만화로 눈까지 즐거워진다.
● 태조3년 8월 11일
윤신달·유한우 : 지리의 법으로 보면 무악은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
태조 :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유한우 :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태조: 네가 서운관 관리인데 모른다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너는 개경 땅의 기운이 쇠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유한우 : 개경의 지기가 약해졌다고 하는 것은 도참입니다. 신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태조 : 도참도 지리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새 왕조를 연 후 개경을 떠나 도읍을 옮기려는 태조, 그리고 집과 땅, 삶의 터전이 있는 개경을 떠나지 않으려는 신하들과의 팽팽한 대립을 만화로 표현했다.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적 사건, 인물을 쉽게 접할 수 있게 수십 장의 이미지, 그리고 드라마틱한 상황에 대한 만화까지.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곁들여진 만화로 눈까지 즐거워진다.
조선왕조실록은 다양한 이야기로 현재에 말을 걸고 있다. 그 말은 국가의 운영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까지 다양하게 녹아 있어서 마음의 양식이 되고 풍성한 지식이 된다. 과거의 기록과 삶에는 그 흔적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다. 백과사전식 지루한 역사책은 가라!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건과 인물을 포착, 역사 읽기의 재미를 더하는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으로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키워보자.
∴ 본문 엿보기
태조 이성계는 즉위식 날 잠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에서 말을 타고 수창궁으로 갔다. 그리고 수창궁 앞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왕이나 왕비의 거처나 업무공간)으로 들어갔다. 어좌에 앉지도 않았다. 어좌 옆에 서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그리고 즉위연설을 마친 후 신하들에게 평소대로 업무를 보라고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조선 창업군주의 즉위식은 이렇게 끝났다.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업한 태조의 즉위식, 이성계는 말을 타고 단촐하게 즉위식에 갔던 것이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가 동행한 기록도 없다. 어보를 전달하는 의식도 없었고, 즉위식에 어울리는 풍악을 울리지도 않았다. 외국에서 파견된 축하사절도 없었고, 새로운 나라가 시작됨을 알리는 선포식도 없었다. 더군다나 어좌에 오르지도 않았다. 왜 어좌에 오르지 않고 어좌 옆에 섰을까? ―<1장 태조의 즉위와 조선의 탄생> 17쪽 중에서
태종 13년, 의정부 좌정승 하윤은 남대문에서 용산강까지 운하를 파자고 했다.
“숭례문에서 용산강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띄운다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다만 모래땅이므로 물이 항상 가득 찰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의정부 찬성사 유양은 운하건설을 반대했다.
“용산강은 도성에 가까운데, 백성들을 힘들게 할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운하건설에 찬성했으며, 박자청은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곳은 모두 물이 괴어 있는 논이기 때문에 물이 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1만 명을 주시면 한 달 안에 운하를 파겠습니다.”
결국 태종은 백성의 수고로움을 염려해 착공하지 않았다.―<1장 태조의 즉위와 조선의 탄생> 103쪽 중에서
다음은 태종 13년, 박자청의 서경을 두고 태종과 사간원이 나눈 대화이다. 어떻게든 박자청을 임명하려는 태종의 결의와, 자신들의 고유업무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사간원 간의 팽팽한 대립을 읽을 수 있다.
태 종 : 박자청의 임명장을 어째서 동의하지 않는가?
사간원 : 관리의 우두머리인 재상은 임무가 매우 중요합니다. 박자청의 가문을 논하지 않더라도, 척석놀이를 하고 관리를 때렸으니 어찌 재상에 맞겠습니까?
태 종 : 박자청은 공사의 감독을 부지런하게 잘해서 임명하려는데, 너희들은 끝까지 서경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냐?
사간원 : 만일 공이 있다면 상이나 다른 직책을 주면 됩니다. 신 등은 정말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만일 전하께서 강요하신다면 명을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태 종 : 이것이 무슨 말이냐! 내가 부탁하고 애걸복걸해서 임명에 동의했다고 생색을 내려는 것인가!
박자청은 67세에 죽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서 사관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인품이 가혹하고 각박했다. 은혜를 베풀지 않았고 남을 시기했으며 이기려고 했다. 특별한 재능은 없었지만 토목공사를 잘한 공로로 사졸병사에서 1품의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사관의 인물평에서 오히려 집안과 학문의 배경 없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박자청의 의지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1장 태조의 즉위와 조선의 탄생> 105~106쪽 중에서
영의정부사에 올라 화려한 전송을 받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심온은 자신의 발아래에 뇌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오른 영의정과 외척이 바로 뇌관이었다. 자신을 변호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그는 너무나 억울했을 것이다. 왕비가 된 딸에게도 가슴 아픈 응어리를 남겼다.
외척 민무구 형제와 심온, 그들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태종의 시대에 살았다. 왕권보다 신권을 주장했던 정도전이 살해됐을 때 그 교훈을 새겼어야 했다. 그런데도 세자빈과 중전을 등에 업고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태종에게 중요한 것은 강력한 왕권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통해서 조선이 뻗어나가길 바랐고, 그것을 위협하는 걸림돌은 그게 무엇이든 제거 대상이었다. 위험은 높은 곳에서 자주 발생한다. 역사는 항상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높은 곳에 오른 자만감에 취해서 삼가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사를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다.―<2장 정종과 태종의 시대> 158~159쪽 중에서
세종 15년 1월, 왕이 여진족 정벌을 처음으로 결심하고 최윤덕을 평안도 병마도절제사로 임명한 때부터, 세종 22년 12월 김종서가 함경도 병마도절제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세종실록』에는 왕이 8년 동안 여진족 문제로 논의한 내용이 무려 800여 건이 넘는다. 8년 동안 3일에 한 번 정도는 신하 및 현지 책임자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작전을 짜고 지시했던 것이다.
세종은 북방에 군사 책임자를 보내놓고 손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정의 신하뿐만 아니라 현지 책임자들과 숱하게 의견을 교환하면서 어떨 때는 강경책으로 정벌하고, 어떨 때는 유화책을 쓰며 노력했다. 우리 국토를 넓히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의 이러한 의지와 노력이 왜 선조(임진왜란)와 인조(병자호란)에게 이어지지 않았을까? 역사를 거울로 삼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다. 세종의 위대한 지도력을 다시 한 번 우러러보게 된다.―<3장 세종의 지도력> 208~209쪽 중에서
조선의 왕들 중에도 술로 소통하는 왕이 있었고, 금주령을 내린 왕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술자리’를 검색하면 1,205건이 나오는데, 이중에서 577건이 14년간 재위한 세조 때이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세조 재위시절이 거의 절반의 횟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세조가 얼마나 자주 술자리를 마련했는지 알 수 있다. 반면 ‘금주령’을 검색하면 225건이 나온다. 가뭄 등 자연재해가 닥치면 근신의 의미로 금주령을 내렸다. 세조 때도 가뭄이 있었지만 금주령을 내린 기록은 없다.
세조는 즉위 5개월 후 사정전에서 조정대신들과 국정을 논한 뒤 술자리를 가졌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사헌부 집의 이예는 술에 취해서 어탑 위에 올라가 임금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이유를 강력히 처벌하십시오.”(중략)
이예는 다음 날 왕에게 사죄했다.
“신이 어저께 술에 취해 예의를 잃었으니 벌을 주십시오.”
그러나 세조의 반응은 의외였다. 벌을 주기는커녕 담비가죽으로 만든 귀마개를 선물로 내렸다.
“고마워 말고 신경쓰지 마라.”(중략)
하지만 이제 세조가 집권 초기 술자리에서 보여주었던 너그러움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신하들은 술자리에서 말을 더욱더 가려야 했다. 세조는 술자리를 자주 마련해서 신하들과 소통하려고 했으나, 그 술로 인해서 차츰 자리에서 사라지는 공신들이 늘어났다.
―<4장 세조, 정치적 풍운아의 승부수> 259~263쪽 중에서
한번은 강무에서 포위망을 좁혔으나 짐승들이 상당히 빠져나갔다. 세조는 몰이꾼 대장인 잡류장 은천군 이찬을 불러 그 이유를 추궁했다.
“신은 혼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상과 승지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승지들은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짐승몰이를 태만하게 해서 대오가 정비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찬은 태종의 서자 경녕군 이비의 아들로 종친이기에 재상과 승지들을 거론할 수 있었다. 세조는 현장에 있던 승지 5명을 불러서 서열대로 그 이유를 물었다. 좌승지 윤흠, 우승지 윤잠, 좌부승지 이계손은 부인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보다 아래 서열인 우부승지 최선복은 실토했다.
“동부승지 김수녕이 먼저 말을 꺼내 같이 의논해 음식을 먹었습니다.”
“너희들은 어째서 바로 아뢰지 않았는가!”
세조는 잘못을 부인한 승지 셋에게 크게 화를 냈다.
“승지는 나의 측근이다. 작은 허물을 덮어주니 믿고 해이하게 구는구나. 이런 폐단을 없애야겠다. 반드시 어질고 착한 이를 골라서 써야겠다.”
세조는 다음 날 바로 중전의 조카인 좌승지 윤흠을 포함한 5명을 모두 교체한다. 강무를 군사훈련이나 실전처럼 엄격하게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4장 세조, 정치적 풍운아의 승부수>
317~318쪽 중에서
저자 소개
KBS PD로 공채 입사해서 , <세계는 지금>, <역사탐험>, <역사추리>, 등 30여 년동안 TV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특히 조선의 역사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KBS 퇴직 후 제2의 인생으로 <조선왕조실록>의 완독에 도전했고 제1권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을 빼고 철저한 사실을 근거로 객관적 시각을 전달하는 것이 생명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사적 감정을 빼고 원전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진진했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큐멘터리 PD로서 객관적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찾아내려는 직업적 소명이 꿈틀거렸다.
이 기쁨을 주변과 나누고 싶었고 인터넷 신문은 좋은 창구가 되었다. 처음에는 <왕현철의 궁궐 이야기>로 시작해서 <왕현철의 조선 이야기>로 발전돼 갔다. 글이 쌓이면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싶다는 주변의 요청이 있었다. 이런 응원에 힘입어 내용을 좀더 자세하고 새롭게 다듬어 마침내 책으로 출간 하게 됐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나를 반추할 수있고, 역사의 거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현실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역사에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이 책은 그 해답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500년의 기록이 충분히 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목차
머리말 | 드라마는 역사가 될 수 없다, 반면 역사는 드라마가 될 수 있다
1장 태조의 즉위와 조선의 탄생
화려한 즉위식은 없었다
왜 어좌 옆에 섰을까? / 고려 국새가 어떻게 이성계 집으로 왔을까? / 즉위 연설을 하다/ 500년 조선 왕조의 시작
[남은 이야기] 조선 국왕의 즉위식은 왜 조용히 치러졌을까?
[남은 이야기] 단종의 즉위식
도읍을 정하라
새 나라의 새 터전을 찾아서 / 한양을 버리고 계룡산으로 / 두 번째 좌절
한양과 경복궁의 탄생
첫 번째 명당은 부소, 그다음은 남경 / 정도전의 시기상조론 / 마침내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 하다 / 경복궁이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 / 드디어 한양으로 옮기다
[남은 이야기] 경복궁의 탄생, 무학대사와 정도전
한양도성 공사를 시작하다
도성공사를 시작하다 / 난코스 동대문 구간 / 두 번째 공사를 시작하다
[남은 이야기] 한양도성 개축
왕 씨를 제거하라
박위가 불러온 나비효과
[남은 이야기] 조선, 왕씨를 복권하다
정도전, 과연 조선의 장자방인가
정도전과 이성계의 첫 만남 / 위화도 회군 / 이성계를 왕으로 세운 최초의 기획자는?
정도전, 조선의 설계사
조선의 기틀을 다지다 / 제도, 정책, 음악, 군사에서 법전까지
[남은 이야기] 정도전, 그늘을 드러내다
조선의 또 다른 건국세력 조준
이 씨가 나라 세운 공은 조준에게 있다 / 이성계와 조준의 만남 / 사전혁파 / 시중에 오르다 / 법치국가의 기반을 닦다
[남은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긴 졸기를 남긴 조준
조선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 박자청
내시에서 장관, 장군에 오르다 / 태조의 눈에 들다 / 아름다운 조선 건축의 설계자 / 조선의 세 가지 장관 / 나무 심기에서 운하건설 계획, 외교업무까지 /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굴의 의지 / 인재를 발탁하는 열린 눈
2장 정종과 태종의 시대
정종, 얼결에 왕이 되다
태조, 방석을 세자로 삼다 / 제1차 왕자의 난 / 정종의 탄생 / 개성으로 환도하다
[남은 이야기] 태조의 여덟 아들, 권력과 평범한 삶의 경계를 보다
태종의 즉위, 다시 한성으로
즉위일, 태종은 왜 빼곡한 일정을 소화했을까? / 한성으로 환도하다
[남은 이야기] 함흥차사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가?
태종, 매의 눈으로 속내를 감추다
조선 왕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 천재지변을 이유로 전위를 거론하다 / 덫에 걸려든 민무구 형제 / 민무구 형제를 처벌하다 / 뿌리에서 뻗은 가지가 드러나다 / 세자가 죄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다
두 번째 전위소동
이제 복위는 없다 / 폐세자가 된 양녕 / 어진 이를 세자로 삼자
[남은 이야기] 충녕대군과 황엄의 예측
상왕 같은 상왕 아닌 상왕
심온 생애 최고의 날 /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은 죄를 묻다 / 간악한 신하를 제거하라 / 오직 강력한 왕권을 위하여
3장 세종의 지도력
첫 새해를 맞이하다
회회까지 참석한 신년 하례회
집현전을 세우고 활용하다
문풍 진흥을 위해 / 초기 업무 / 집현전의 의견을 물리치다
옛 제도를 조사해서 고하라
집현전 재택근무를 실시하다 / 모든 분야의 책을 섭렵하라 / 열흘에 한 번씩 시험을
역사와 경전에서 답을 찾다
세상 만물에 대한 만 가지 답변 /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제1차 파저강 승전 축하연을 열다
조선 왕이 주재한 유일한 승전 축하연 / 여진족의 횡포 / 여진족 정벌을 계획하다 / 큰 승리를 거두다
[남은 이야기] 최윤덕의 승진과 세종의 인사관
제2차 파저강 여진족 정벌
한 뼘의 땅도 넘겨주지 않겠다
[남은 이야기] 우의정 노한의 몰락
6진을 개척하다
국토를 넓힐 절호의 기회 / 북방 국경을 세우는 임무를 맡은 김과 김종서의 합작품, 6진
풍수에 답하다
경복궁과 청와대 터, 길지인가, 흉지인가 / 최양선, 논란의 불씨를 지피다 / 세종, 풍수에 안목을 기르다 / 권도의 간언 / 경복궁은 명당이다 / 더 이상 풍수를 믿지 않다
[남은 이야기] 강녕전에 나타난 뱀
[남은 이야기] 수릉과 영릉 그리고 풍수학
[남은 이야기] 문종, 종기로 죽음에 닿다
4장 세조, 정치적 풍운아의 승부수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다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 / 한명회와의 첫 만남 /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가다 / 포섭 / 선수를 치다 / 김종서를 처단하다 / 계유정난 공신 소동 / 단종의 선위와 수양대군의 즉위
[남은 이야기] 수양대군의 계란과 안평대군의 바위
기이한 현상을 정치에 이용하다
국가의 상서를 알고 있느냐? / 정이품송 이야기 / 전국에서 나타난 기이한 현상 / 하늘이 임금을 인정하다 / “이 늙은이가 취해서 망령스럽구나” / 모든 왕이 상서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 세조가 상서에 빠진 이유
술로 소통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다
술자리를 자주 연 세조 / 호랑이 발톱을 감추다 / “취중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합니다” / 경연을 멀리한 세조 / 영의정 정창손 쫓겨나다 / 죽음을 불러온 양정의 실수 / 세조의 역린
당대의 난신이요, 후대의 충신이다
정치 일번지 사정전 / 단종복위운동, 피바람의 시작
[남은 이야기] 사육신에 대한 기록
흥례문에서 국가 비상훈련을 하다
출입이 엄격히 제한됐던 경복궁 / 마침내 근정전을 정면으로 보다 / 흥례문의 다양한 용도 / 국가 방위를 위한 훈련장소
[남은 이야기] 흥례문과 홍례문
군사훈련과 실전, 강무와 북정
세조의 강무 / 강무에도 예가 있다 / 신하들이 강무를 싫어한 이유
총대장 신숙주, 여진족을 정벌하다
신숙주의 북정 중지 불가론 / 건주위를 정벌하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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